새벽 두 시 어제 밤 열 시에 잠자리에 들었으니 정확히 네 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수십 년 동안 익숙해진 이 ‘4시간 수면’은 학창 시절부터 이어진 습관이다.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이른바 ‘4당5락’(4當5落)이라는 입시 슬로건이 내 몸에 각인되어버린 것이다. 대학에 꼭 합격한 것도 아니었고, 성공한 삶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이상하리만큼 그 습관만은 여전히 내 몸을 지배한다.
퇴직 후 여유로운 삶이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새벽같이 하루를 시작하는 이른 기상은 때때로 하루를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퇴직 후엔 늦잠도 자고 게으름도 피워보려 했지만, 어느새 눈이 떠지고, 잠은 도망간다. 그래서 지난해부터는 새로운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억지로 다시 잠을 청하기보다는 책장 앞으로 가서 마음이 끌리는 책 한 권을 꺼내 읽는다. 그리고 조용히, 천천히 책장을 넘긴다. 졸음이 밀려오면 슬그머니 책을 덮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수면의 리듬을 조정하면서, 요즘은 하루 7시간 정도의 수면이 가능해졌고, 덕분에 일상도 훨씬 건강해졌다.
책장은 나에게 단순한 수납 공간이 아니다. 나만의 아트센터이자, 시간여행의 출발점이다. 책꽂이 앞에 서면 책들이 손짓을 한다. “오늘은 나를 골라달라”고 아우성치는 듯하다. 오늘 새벽, 눈길이 머문 책은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였다. 제목이 주는 잔잔한 울림에 이끌려 책장을 넘기다 ‘루이보스 차’라는 낯선 단어를 만났다. 수십 년 동안 차를 즐겼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검색해보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시더버그 산맥에서 자라는 식물로 만든 무카페인 차라 한다. 마음에 들었다. 잠 못 이루는 새벽, 나는 주저 없이 루이보스 차를 주문했다. 차가 도착할 때까지는 차맛을 기다리며 그 기다림을 즐기는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된다.
시골에서의 삶은 겉으로 보기엔 조용하고 단조로워 보이지만, 그 속에는 늘 작은 소동이 숨어 있다. 전날 밤, 강한 바람과 폭우가 몰아쳤다. 마당에 설치해둔 타프가 날아갔고, 방수 기능이 있다던 텐트 안에 물이 스며들어 물을 퍼내느라 애를 먹었다. 닭장도 무사하지 못했다. 바람과 닭들의 몸부림에 닭장 문이 열려 다섯 마리의 닭이 탈출했다. 마당을 뛰어다니며 네 마리는 다시 잡아 넣었지만, 한 마리는 끝내 찾지 못해 포기했다. 그런데 저녁 무렵, 마치 외출을 마친 반려동물처럼 그 닭이 다시 닭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날이 밝으면 또다시 작은 추격전이 벌어질 것이다.
이제는 길가에 풀이 자라 길을 막아도 짜증보다는 풀꽃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 사이 삶의 내공도 조금씩 쌓였나 보다. 자연을 이해하고 기다림을 배웠다.내가 사는 집에는 ‘시은숙(市隱塾)’이라는 당호가 붙어 있다. 도시에서 물러나 숨어 있는 작은 글방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이곳에서 책과 음악을 벗 삼아 조용히 살아가고자 했다. 그렇게 시골살이를 한 지 어느덧 10년이 지나고 그 시간을 지탱해준 가장 큰 힘은 바로 ‘읽고 듣는 즐거움’이었다.
책은 사유의 공간을 열어준다. 눈으로 글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선다. 책을 통해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여행을 통해 거리의 지평을 확장해나가는 것이 나의 작은 인생 철학이다. 여건이 허락되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곳이 멀든 가깝든, 떠나는 순간부터 나는 또 다른 세계를 배우고 경험하는 여행자가 된다.
소리를 곁들이면 그 여정은 더욱 풍성해진다. 새소리, 바람소리, 풍경 소리,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재즈와 클래식 음악. 그중에서도 가장 좋고 귀한 소리는 걷거나 달릴 때 귓가에 스치는 바람소리다. 그 소리를 들으러 나는 일부러 길을 나선다. 바람을 맞으며 걷는 그 시간, 그 감각이 내게 가장 큰 자유를 선사한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생각이 너무 또렷해져 다시 잠들기 어려울 것 같다. 다시 책을 펼쳐 조용히 잠을 기다려 본다. 이렇게 하루가 또 시작된다. 평범하지만 특별한, 오늘이라는 이름의 하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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